바지유의 화실(Bazille's Studio) by Frédéric Bazille - 1870년 - 98 x 128 cm 바지유의 화실(Bazille's Studio) by Frédéric Bazille - 1870년 - 98 x 128 cm

바지유의 화실(Bazille's Studio)

캔버스에 유화 • 98 x 128 cm
  • Frédéric Bazille - December 6, 1841 - November 28, 1870 Frédéric Bazille 1870년

몽펠리에(Montpellier)의 뛰어난 가문 출신인 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는 그림으로 전향하기 전 의학 공부를 위해 1862년 처음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의 화실에서 그는 미래의 인상주의 화가들인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와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모두 유명한 사실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를 존경했죠.

<바지유의 화실(Bazille's Studio)>은 이런 선구적인 화가들 간의 동지애와 친밀감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줍니다. 배경은 콩다민(Condamine) 거리에 있는 바지유의 스튜디오인데요. 그는 이곳을 1868년부터 1870년까지 르누아르와 함께 사용했습니다. 그림 구성의 중앙에는 바지유가 손에 팔레트를 든 채 서 있는데, 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네가 저를 이 장면에 그려 넣어 줬어요"라고 언급했습니다. 마네는 상당히 힘 있는 양식으로 이 젊은 바지유를 묘사했습니다. 모자를 쓴 마네는 이젤 위의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오른편에는 바지유의 친한 친구인 에드몽 매트(Edmond Maître)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 위쪽에는 모네의 정물화가 걸려 있는데요. 바지유가 모네의 작품을 구매해 줌으로써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것을 나타냅니다. 왼편의 세 명의 인물의 정체는 모호합니다만, 모네와 르누아르를 나타낸 것일 수 있습니다. 소파 위의 <몸단장(The Toilette)>이나 좌측의 <그물을 든 어부(Fisherman with a Net )>, 그리고 1866년 살롱전에서 거절당한 르누아르의 풍경화(창문 오른편에 눈에 띄는 액자에 걸린 그림)를 강조한 이 작품에서 마네와 그의 추종자들을 뭉치게 함으로써 바지유는 아카데미를 비평하고 그의 예술적 관념을 대담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바지유는 이로부터 몇 달 후 프러시아 전쟁 중 사망했습니다. 저는 그가 만약 이렇게 일찍 죽지 않았다면 미술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늘 궁금합니다.

추신 1. 미술사와 인상주의에서 바지유의 중요성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그의 이야기를 담은 저희의 "프랑스 인상주의 종합 과정"을 확인해 보세요.

추신 2. 프레데릭 바지유는 매우 흥미로운 인상주의 화가 중 한 명입니다. 앞서 언급한 <몸단장(La Toilette)>을 포함해 그의 생애와 빛나는 작품들에 관해 더 알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