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모니아 루이스(Edmonia Lewis) by Henry Rocher - 1870년 경 - 9.2 cm x 5.2 cm 에드모니아 루이스(Edmonia Lewis) by Henry Rocher - 1870년 경 - 9.2 cm x 5.2 cm

에드모니아 루이스(Edmonia Lewis)

알부민 프린트(Albumen Silver Print) • 9.2 cm x 5.2 cm
  • Henry Rocher - 1862 - 1887 Henry Rocher 1870년 경

3월이니까, 우리는 여성 역사의 달을 축하합니다.

에드모니아 루이스(Edmonia Lewis)를 기억하세요? 10일 전 즈음, 우리가 그의 조각품 중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작품은 예술가 자신의 많은 것을 얘기해주지만, 가끔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데일리아트에서 무척 드물게 사진을 보여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작품은 에드모니아를 담은 사진입니다.

루이스는 쉬운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19세기의 숨 막히는 세상을 살아온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으로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 매우 힘든 시대였죠. 게다가 그는 조각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건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흑인 아버지와 아메리카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아였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조각가가 되었으며, 19세기 조각가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세웠습니다. 루이스는 틀림 없이 아주 용감한 사람입니다.

에드모니아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오벌린 대학(Oberlin College)에서 교육받고 보스턴에 처음 자리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저명한 정치인, 작가, 노예 폐지론자의 흉상과 메달을 제작했습니다.

1865년, 에드모니아는 로마로 이주하여 재외 미국인·영국인 예술가의 활동적인 모임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널리 유행한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그는, 성경·고전 신화·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루이스의 조각품, <영원한 자유(Forever Free, 1867)>는 노예 해방 선언 뉴스를 처음 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플을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을 본 비평가는 "목화재배자(Cotton King; 노예)로 태어난 사람 말고는, 아무도 이 작품을 깊은 감정 없이 올려다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루이스는 수십 년간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원인불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P.S. 에드모니아 루이스의 뛰어난 조각품과 신비한 삶을 여기에서 다뤘습니다. <3